눈물과 섭리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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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김범태 기자
kbtlove@kuc.or.kr
입력 2002.06.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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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에서 건축까지 ... 강릉중앙교회 건축경과보고
역사적으로도 서울 회기동 본부교회가 설립되던 1911년에 강릉에 최초로 세천사의 기별이 들어와 강릉교회가 설립되었고 그후 영동 전역에 복음이 전파되어 오늘에 이르렀으니 영동지역의 경제, 문화, 교육, 교통의 중심지인 강릉교회가 선교 90주년 기념사업으로 강릉시민들의 구원뿐 아니라 영동지역의 합회적인 사업경영을 위하여 넓고 큰 교회를 건축할 마음을 하나님께서 갖게 하셨다.
연초부터 연합 신년헌신회, 재직수양회, 각종 강습회, 특별 부흥회, 연합기도회 그리고 연말 찬양발표회 같은 전영동지역의 복음사업을 위하여 필요로 하는 집회를 위하여 힘에 겹지만 주어진 여건을 백분 활용하여 다목적 예배당을 건축하였다.
동부교회를 분가시킨 이후 김경식 목사 시절부터 조원웅 목사 시절 새 교회당 건축을 논의해 왔고, 권만복 목사가 담임이던 1996년 12월 28일에는 안건97-8로 건축위원회를 구성하고, 이제욱 목사 시절인 1997년 9월 27일에는 당시 재림연수원 교수였던 이승동 목사를 초청하여 교회건축을 위한 특별기도회를 열었다. 그리고 1998년 12월 31일 송년의 밤에는 교회당 건축을 위하여 철야기도회를 하면서 1999년 새해를 맞기도 했지만 가시적인 용기를 내지 못했고, 힘을 내지 못했다.
1999년 2월말 이제욱 목사는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고, 3월 1일부터 필리핀 선교사로 수고하다 귀국한 오봉렬 목사가 부임하였으나 아무도 새 교회 건축에 대하여 말하지 않았고, 성취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세기가 바뀌어 서기 2000년이 가까워 올 때 ‘2000’이라는 숫자를 인식하지 못하는 컴퓨터의 ‘밀레니엄 버그’로 인해 미증유의 재난이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일반 사회의 불안심리의 확산과 소위 검증되지 않은 지구역사 6000년설로 우리 교인들까지 흔들림이 범상하지 않음을 감지한 연합회와 합회에서는 1999년 9월 18일 안식일 오후에 영동북부지역의 전교회 지도자들을 모으고 남대극 목사를 강사로 특별 성경 연구회를 강릉교회에서 개최했다.
그 날은 비가 부슬부슬 내렸는데 교회당에 입추의 여지없이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쉬는 시간에 비좁은 화장실에 들어갈 순번을 기다리느라 비를 맞으면서 처마 밑에서 불편하게 일렬로 서서 기다리던 여러 성도들이 이구동성으로 교회당도 비좁고 화장실도 불편하다며 강릉교회를 다시 지어야 하겠다는 말씀을 하였다. 강릉교회 장로들과 직원들은 현대식으로 새 교회당을 건축해야 되겠다는 강한 자극을 받게 되었다.
다음 안식일인 1999년 9월 25일 정기 직원회에서 그 해 수석장로였던 권호신 장로를 위원장으로 9명의 건축위원회를 조직하였다. 강릉선교 90주년인 2002년까지 현 교회당을 매각하고 헌금하여 약 1000평 정도의 넓은 부지를 매입, 충분한 주차장을 확보하고 700명 이상 모일 수 있는 연건평 500평 규모의 강릉선교 90주년 기념교회를 건축하기로 뜻을 모았지만 엄청난 건축비 규모에 압도되어 안타까운 심정으로 기도만 할 뿐 답답한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해를 넘기자 교인들은 막연히 기도만 하고 서로 눈치만 볼 것이 아니고 과감하게 행동으로 옮길 필요성을 깨닫고 2000년 2월 26일 안식일 오후 정기 직원회는 소위원회인 건축위원회를 해체하고 교회직원전체회의에서 직접 건축문제를 일괄 다루기로 하고 무기명 비밀투표로 규모를 200평으로 줄이고 헌금표준을 4억원으로 정했다.
1970년대 옛 중한대회 청지기부장으로 수고하던 안천수 목사가 마침 중국선교 방문을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가던 길에 일시 귀국, 친구지간인 오봉렬 목사를 만나는 기회를 이용하여 청지기 부흥회가 열렸다. 부흥회 마지막날인 2000년 3월 11일 안식일에 담임 오봉렬 목사의 호소로 2001년 12월까지 헌금하기로 하고 장로 10평(2000만원), 남집사 7평(1400만원), 여집사 5평(1000만원) 일반 성도 2평(400만원)을 표준으로 헌금서약을 받은 결과 모두 36명이 참여하여 목표액 4억원에 조금 못 미치는 건축헌금을 약정하고 힘을 내기 시작했다.
해를 넘겨 시간은 흘러갔으나 자금이 만족할 만큼 헌금되지 않아 2001년 5월 29일 약정된 건축헌금의 조속한 헌납을 개인적으로 독려하기 위하여 건축재정위원으로 안문필 장로, 권호신 장로, 권금자 집사, 엄정희 집사를 선출했다.
그러나 새 교회당 규모를 아무리 적게 줄여도 주차장을 제외한 300평 규모는 되어야 하겠기에 삼육의명대 건축설계학과 정광호 교수의 도움으로 서울의 다담 건축설계사무소에서 설계를 마치고 인터넷을 통하여 공개적으로 입찰광고를 냈고, 몇 회사로부터 공사 견적을 받은 결과 1층 주차장까지 연건축 면적이 450평 이상이 됨으로 자금규모가 4억여원 밖에 되지 못함을 알게된 대부분의 지명원을 제출했던 건설회사들이 자금부족을 이유로 포기해 버렸다. 그중 한 건축회사는 공사비용으로 8억6천여만원을 제시, 턱없이 부족한 자금에 교인들은 당황스런 좌절을 느끼고 진퇴양난의 벽에 부딪치지 않을 수 없었다.
2001년 7월 7일 강릉중앙교회는 하는 수 없이 비장한 각오로 약속된 자금의 범위만큼이라도 직영으로 건축을 결행하기로 결의했다. 서울과 강릉의 건축종사자 몇몇 교인들에게 교회의 사정을 알리고 도움을 청하였으나 모두들 넌지시 사양하였다. 교회는 정말 홍해 앞에 서있는 것 같은 답답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건축설계사무실에서도 자금 사정 때문에 1,2,3차 공사로 나누어서 집을 지으면 건물의 미관도 나쁠 뿐 아니라 나중에 결산해 보면 공사비도 여러 배 많이 들므로 불가하다고 만류했다. 당장에 건축공사를 시작할 듯 교인들에게 광고하고 설교 했는데 설계사무소를 나오는 발걸음은 깊은 수렁에 빠져 들어가는 것 같았다. 건축을 미루든지 포기하지 않으면 안되는 좌절감과 탄식 속에서 하늘을 우러러 볼 수밖에 없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 로다 ... ”
그동안 강릉중앙교회는 오랫동안 매일 새벽기도를 드려왔다. 교회와 가정에서 모든 성도들은 수없이 많은 기도를 드렸다.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 계셔서 믿고 신뢰하고 당신의 사업을 위하여 간구하는 종들의 기도를 결코 외면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전은 인간의 능력이나 지혜나 돈으로만 건축되는 것이 아니고 성도들의 믿음과 기도와 헌신만 있으면 헌신한 준비된 종들을 통하여 하나님이 당신의 영광을 위하여 친히 지으시는 것이다.
90년 역사를 가진 뿌리깊은 강릉중앙교회 성도들의 믿음과 눈물 섞인 기도와 살을 도려내는 듯한 헌신을 기억하신 하나님은 정년퇴직을 앞두고 평생 40년 목회 외길을 걸어온 담임 오봉렬 목사는 불쌍히 여기사 섭리를 행하셨다.
서울 묵동교회 건축헌금약정을 위하여 주말부흥회를 인도하러 초청받은 오 목사는 그곳에서 뜻밖의 한 사람을 만났는데 그는 초등학교 소년시절부터 자라는 모습을 잘 알고 지냈을 뿐 아니라 이전 홍천에서는 3년간 담임목사와 장로로서 함께 교회를 섬기던 박정국 장로를 만나게 된 것이다. 오 목사를 통하여 강릉교회의 사정을 들은 박 장로는 약 15일간의 숙고와 기도 끝에 첫째는 하나님을 위하여, 둘째는 어린 시절부터 존경하던 오 목사의 마지막 성전 건축을 이루려는 헌신을 돕기로 작정했다.
건축업자로서 교회가 준비한 설계도대로는 건축자금 4억5천만원으로는 절대 공사를 수주하여 시공할 수 없고 설계를 변경하여 벽돌대신 드라이 비트로, 철근 콘크리트조 대신 철골 콘크리트조로 자신이 갖고 있는 경험과 지혜와 능력을 모두 동원하여 이익 없이 당신 자신의 집을 건축하는 것처럼 비영리로 교회를 지어주기로 뜻을 정했다.
교회와 교인들은 마치 물이 없어 며칠씩 기갈에 허덕이다 죽음 직전에 처해있던 사막의 나그네가 오아시스 생명수를 만난 듯 하나님이 준비해 두셨다가 보내주신 하나님의 일꾼을, 광야에서 성막을 지은 브사렐과 오홀리압 같은 하나님의 종을 만난 기분이었다.
2001년 7월 17일 교회 직원회에서 공사 직영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확인하고 박정국 장로에게 공사를 부탁하기로 결정했다. 오봉렬 담임목사는 회의에서 또는 안식일 설교 말씀 중에 여러 차례 하나님께서 이들을 어여삐 여겨 교회의 소원과 기도를 들으시고, 강릉교회 건축을 위해 옛날 이스라엘 백성을 홍해바다를 건너게 하시듯, 오늘날 크신 이적을 베푸시기 위해 준비된 당신의 종을 보내주셨으니 하나님께 크게 감사하자고 전했다.
2001년 8월 22일 오전 10시 합회장 엄보석 목사를 비롯한 합회 임원과 인근 교회의 여러 성도들이 자리한 가운데 기공예배를 드리고, 공사를 시작했다. 성도들의 기대를 가득 안고 믿음과 기도로 첫 삽을 뜬지 어언 9개월. 늦어도 4,5개월이면 완공될 줄 알았지만 덥고 추운 긴 지체의 터널이었다. 처음에는 추운 겨울이 무서워 무작정 흘러가는 나날이 안타깝고, 아깝고 짜증스러웠으나 차츰 우리를 준비시키시는 하나님의 손길로 깨닫기 시작했다.
한 발자국, 한 발자국씩 준비된 그릇의 분량만큼 채워주시고 인도하시는, 그래서 방심하지도 않고, 자랑하지도 못할 만큼 알맞은 긴장과 겸손을 배우게 하셨다. 약속된 헌금이 기대만큼 헌납되지 않으니 만일 쉽게 공사가 진척되었더라면 공정에 따라 지불해야 할 자금 부족으로 희생적으로 수고하는 박 장로에게 큰 폐를 끼칠뻔 했다. 그러나 공기가 지체됨으로 답답하기는 했으나 돈 때문에 큰 고생은 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공사의 진도를 섬세하게 조정하고 계셨던 것이다. 하나님의 전은 돈으로 인간이 짓는 것이 아니고 믿음과 기도와 헌신만 있으면 하나님이 지으시는 것임을 다시한번 경험하게 하셨다.
시작할 때 강릉교회는 무모하리만큼 가진 것이 턱없이 부족했다. 그러나 믿음으로 시작했다. 합회의 도움이 위기를 극복하는 커다란 힘이 되었다. 정성스럽게 매 안식일 드려지는 성도들의 헌금은 정말 눈물겨웠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고 당신의 전을 완공해 주시리라는 믿음으로 약속을 의지하고 따랐다. 그러나 공사가 지체됨으로 가끔 초심을 잃고 불평하고 의심하고 원망도 했다. 비틀거리는 저들의 모습이 마치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과 너무도 닮아서 자신들의 믿음 없음과 신의 없음에 몇 차례나 소스라치게 놀라기도 했다.
되돌아보면 주기도문의 구절처럼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셨는데도 말이다. 광야의 만나 주심처럼 남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필요를 따라 적당하게 주셨는데 그들은 자주 염려하고 불안해하고 낙망해 했다. 날마다 일마다 믿고 신뢰하고 범사에 감사하기만 했으면 참 좋았을텐데, 모든 일이 합동하여 선을 이루었을 텐데. 그러나 은혜로우신 하나님은 그들의 믿음 없음을 책망치 않으시고 성전건축을 마쳐주셨다.
모든 성도들이 2001년 12월 29일 공사 중인 2층 다목적 세미나실로 입주하여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기 까지 5개월 동안 불편을 감수했다. 벽돌값 3,000만원만 더 있으면 건물 외벽을 드라이 비트 대신 벽돌로 변경할 수 있다는 소식에 어느 성도의 자발적 추가 헌금이 종자돈이 되어 벽돌 건물을 지을 수 있게 된 것도 감사한 일이다.
실공사비는 모두 4억8천만원이 소요되었으나 아직 조금 미지급되었고, 기타 부가세와 법인세 등을 지불해야 하는 짐이 남아있지만, 여기까지 인도하시고 성취케 하신 하나님께서 그들의 믿음과 헌신에 넘치도록 축복하실 것이다. 주님은 어려울 때 생각지 않은 당신의 종들을 통하여 자금을 헌납하게 해 주셨다. 총 건축 건평은 주차장을 포함하여 450여평. 아울러 인근에 전도사 사택까지 함께 장만할 수 있었다.
인터넷에 올려진 교회 건축계획을 보고 최초로 30만원을 보내주어 용기를 준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어느 형제, 이제는 강릉교회를 떠나 다른 교회를 섬기고 있으나 고향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특별헌금을 드린 많은 성도들의 기도와 관심 등 모든 성도들의 인내와 눈물의 기도가 일구어낸 값진 성전이다.
*자료제공=강릉중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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