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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 ‘평화의 길, DOSS road’를 가다 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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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범태 기자 kbtlove@kuc.or.kr 입력 2019.04.11 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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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징용 희생 조선인 추모를 위한 요미탄 ‘한의 비’(恨の碑) 앞에서
몇 해 전, 한 방송에서 일제강점기 강제징용됐던 한국인들이 정착한 일본 우토로마을이나 ‘군함도’ 하시마섬, 다카시마 공양탑 등 어느덧 우리에게 잊힌 과거의 상처를 일깨우는 프로그램을 방영해 국민적 감동을 불러일으킨 적이 있다. 오키나와 역시 일제 강제동원의 가슴 아픈 역사가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채 곳곳에 남아 있는 현장이다.

‘평화의 길, Doss road’. 이젠 데스몬드 도스의 발자국을 넘어 전쟁이 남긴 비극의 장소를 찾아가는 여정이다.
  
나하교회에서 북쪽 방면으로 약 40Km 정도 떨어진 곳에는 ‘한의 비’(恨の碑)가 세워져 있다. 자동차로 1시간이면 넉넉하게 닿을 거리다. 김광성 목사(새천안교회 담임)가 PMM 1기 선교사로 파송돼 봉사했던 요미탄이라는 지역이다.

‘한의 비’는 오키나와전(戰)에 강제징용돼 억울하게 죽어간 한국인들을 추모하고, 일제의 만행을 후대에 알리기 위해 2006년 5월 건립했다.

경북 영양군 출신으로 1944년 오키나와에 끌려와 강제노역을 했던 고 강인창 선생의 증언을 토대로 세웠다. 그에 의해 조선인 징용자들의 고된 노동과 인권유린이 밝혀졌다. 그는 동료들이 무참히 죽어가던 구덩이를 자신의 손으로 파야 했고, 처형되거나 학대 받는 현장에 입회를 강요당하기도 했다.  

이 비를 건립하기까지 양심 있는 일본인들이 앞장섰다. 1997년 아시아태평양전쟁 오키나와전 피징발 조선반도 출신자들을 기리기 위한 시민단체 ‘한의비건립을위한모임’이 발족됐고, 자발적으로 성금을 모금했다. 그리하여 강인창 선생의 고향인 영양군에 1999년 먼저 세우고, 7년 후 똑같은 형태의 ‘쌍둥이 추모비’를 이곳에 건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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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 과정이 그리 순탄치 만은 않았다. 무엇보다 주민들의 반대로 몇 년의 시간이 걸려야 했다. 다행히 히라 산다라는 일본인이 앞으로 평화공원을 만들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사비를 털어 땅을 기증하면서 현실화될 수 있었다.

‘한의 비’는 두 눈을 가린 채 일본순사에 의해 강제로 끌려가는 아들을 보며, 슬퍼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오키나와 출신의 민중조각가 긴죠 미노루 선생이 조각한 조형물이다. 그는 자기 생애 최고의 작품으로 이 비석을 꼽았을 만큼 한의 비에 남다른 애정을 가진 인물. 인간의 존엄성과 평화를 바라는 마음을 사실적으로 표현했다.

■ 비문
일본은 아시아태평양전쟁과 오키나와전쟁 당시 조선반도에서 100만 명 이상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을 강제 연행했으며, 이들을 일본군의 성노예로, 혹은 전쟁을 위한 일꾼으로 노역시켰다.

경상북도에서 오키나와로 징용자들이 끌려온 것은 1944년 6월 경. 이들 중에 강인창 씨는 게라마제도의 아카섬에, 서정복 씨는 미야코섬에 배치되었다.

오키나와의 지상전은 1945년 3월 26일에 시작되었다. 두 분은 동포들의 죽음을 목격하기도 하고, 처형되거나 학대를 받는데 입회를 강요당하기도 했다.

우리들은 조선반도와 오키나와 두 곳에 마주서는 동일한 추도비를 건립할 것을 결정했다. 그리고 불행한 과거를 마음에 새기고, 평화공생에 대한 결심의 증표로 삼고자 하는 많은 동참자들의 도움으로 이 비를 세웠다.  2006년 5월 13일


그 왼편에는 경북 영양군과 울진군, 경주시에서 가져온 돌이 자리를 지키고 있고, 오른편에는 희생자들을 위로하는 비문과 추도시가 한글과 일본어로 적혀 있다. 비문의 시는 아사토 에이코 작가가 썼다. 세월이 흐르며 군데군데 이끼가 끼고 변색됐지만, 여전히 깊은 울림으로 참배객들의 발길을 붙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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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가 남형우 목사의 안내로 ‘한의 비’를 찾던 날은 하늘이 잔뜩 찌푸린 흐린 날씨였다. 일본에서는 요정이 산다는 전설이 있는 가지마루나무 사이로 스산하게 바람이 불다 멈추기를 반복했다. 누군가 갖다놓은 검정꽃신은 한국을 향해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조총련계 초중급학교 학생들은 종이학을 통에 넣어 참배하고 갔다.  

솔직히 ‘한의 비’는 이 마을 지리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쉽게 찾아가기 힘들 정도로 외진 곳에 있다. 초행길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저 고즈넉한 풍경의 주택가 사이에 꽂힌 손바닥만한 하얀 팻말만이 이곳이 길목임을 말해준다. 주차장도 없는 동네어귀에 차를 대고, 좁다란 골목을 따라 200m가량 올라가야 한다.

그러나 꼭 한번쯤은 방문할 가치가 있는 장소다. 어지간한 설명문 하나 없지만, 과거의 슬픈 역사를 가슴으로 느낄 수 있다. 비문과 추도시는 읽으면 읽을수록 마음이 얼얼하게 아파온다. 우두커니 서서 몇 번이고 다시 읊조리게 된다. 먹먹한 가슴에 한동안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 딱히 할 일도 없으면서 주위를 맴돌게 된다. 비석 주변을 정리하던 남형우 목사가 조용히 말을 건넸다.  

“지난해 연말, 삼육대 일본어학과 학생들이 봉사대를 왔다가 이곳에 잠시 들러 주변을 청소하고 갔어요. 의미 있는 시간이었죠. 이 근처에 잔파곶, 만좌모, 아메리칸 빌리지 등 유명 관광지가 많은데 기회가 된다면 그런 곳보다는 이곳을 방문하길 추천합니다. 특히 아이들에게는 다시는 이런 비극적 역사를 반복해서는 안 된다는 평화와 인권의 산교육을 할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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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시간 관계상 가보지는 못했지만, 오키나와엔 이곳 외에도 미야코지마와 토카시키섬에 ‘아리랑 위령비’가 있다고 한다. 일본군에 의해 강제로 끌려간 한국인 위안부를 기리기 위해 건립한 것이다. 일본군 위안부 최초 증언자인 배봉기 할머니의 증언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당시 토카시키섬에는 7명의 조선인 위안부가 있었다.

한편, 한일 양국 정부의 무관심 속에 정확한 실태 조사가 이뤄지지는 않았지만, 언론에 따르면 일제 말기 오키나와에 강제로 끌려와 숨지거나 행방불명된 조선인은 최대 1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대부분 비행장을 건설하거나 군수물자를 수송하는 역할을 했는데, 일제는 전세가 불리해지자 이들을 전투에 동원하기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군속으로 끌려온 박희태 씨의 경우 배고픔을 견디지 못해 민가의 고구마를 훔쳐 먹다 그 자리에서 고향에서 같이 온 3명의 조선인과 함께 참수를 당하는 끔찍한 일도 있었다.

영문도 모른 채 끌려와 이역만리에서 처참하게 죽어간 조선인 강제동원 피해자의 사연은 우리에게 평화가 형식적 교육에 그치면 안 된다는 쓰린 교훈을 남긴다. 일본 우익은 아직도 태평양전쟁이 유라시아를 지키려는 자신들의 평화와 자유의 전쟁이었다고 주장한다. 여전히 자신들이 피해국이라고 생각한다. 그러고 보니 기사를 출고하는 오늘(4월 11일)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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