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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기획] 청년, 길을 묻다 - 조문양 교수 편(마지막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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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 - 김범태 기자 kbtlove@kuc.or.kr 입력 2019.08.09 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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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미가는 우리 삶의 모든 방면에서 축복 되는 문화콘텐츠”
조문양 교수는 “찬미가는 우리 삶의 모든 방면에서 큰 축복이 되는 문화콘텐츠”라고 강조한다.
- 전편에 이어 - ▲ 마지막으로, 교회음악이 하나님께 대한 경배와 예배의 차원을 넘어 일상의 위로와 평안의 음악이 될 수도 있을까요? 그러려면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요?
- 좋은 질문입니다. 찬미가와 성곡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일상에서 그 축복을 누릴 수 있지요. 먼저 찬미가에 대하여 말씀 드리죠.

찬미가는 예배에서 주로 사용되지만 그 못지않게 사용되어야 할 곳이 있다면 생활 현장입니다. 음악이 없는 삶이나 찬양이 없는 예배를 상상해 보십시오. 신앙이 깊어질수록 생활은 예배가 됩니다. 그 예배 속에 찬송이 있다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공생애 이전 목수로서의 예수님의 입술에서는 늘 즐거운 찬송이 흘러 나왔으며, 이스라엘 백성들의 예루살렘을 향한 해마다의 유월절 여행길은 즐거운 찬송으로 가득했었다는 기록이 예언의 신에 있습니다. ‘현대의 이스라엘’인 우리의 새 예루살렘으로의 여행길에 찬송이 있다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며 축복입니다.

찬미가는 예배전용이 아닙니다. 일상생활에서 찬미가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몇 가지 사례를 말씀 드리겠습니다.

저는 평생 음악교사로 일하면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학생들에게 강조한 게 있는데 그것은 “유행가에 빠지지 말자”라는 것이었습니다. 대중가요에 심취하면 찬미가에 대한 흥미가 감소되기 때문입니다. 배우려고 애쓰지 않아도 쉽게 알게 되는 대중가요에 빠져서 귀중한 학창시절을 낭비하는 것이 너무 안타까운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고등학교 교사 시절, 수학여행 중에도 유행가는 철저하게 금지했습니다. 당시 학생들이 즐겨 부르던 대중가요는 지금은 예술가곡처럼 변한 것들인데 지금 생각하면 조금은 지나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오래 전에 그 시절 제자들 중의 한 명으로부터 편지를 받은 적이 있어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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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삼육고등학교를 졸업한 한 제자인데, 당시 그의 직업은 아스팔트를 다지는 롤러(Roller)차의 운전기사였습니다. 아시는 대로 육중한 큰 바퀴가 달린 롤러차가 하는 일은 새로 깔아 놓은 아스팔트 위에서 일정한 속도로 전후로 왔다 갔다 하며 그 표면을 판판하게 다지는 일입니다. 반복되는 단순노동에서 제일 어려웠던 건 쏟아지는 졸음을 참아내는 일이었다고 합니다.

작업 중 한순간의 졸음이나 방심은 생명을 위협하는 큰 사고로 이어지기 때문에 여간 주의해야 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졸음을 이기기 위해 큰 소리로 유행가를 부르면서 작업을 했는데, 아무리 큰 소리로 유행가를 불러도 몰려드는 졸음은 어찌할 수 없었다고 했습니다. 볼을 꼬집어도 보는 등 별 수단을 다 부렸는데도 졸음을 참기가 힘들었답니다.

마지막으로 찬미가를 불러 보았는데 그렇게 쏟아지던 졸음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고 했습니다. 그는 편지에서 “선생님, 저에게 음악에 대한 정수를 가르쳐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라고 고마워했습니다. 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그 편지를 지금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습니다.  

저는 출퇴근 시간에 차 속에서 목청 돋우어 찬미가를 부르거나 CD나 테이프에 녹음된 말씀을 듣곤 했습니다. 말씀을 듣는 것도 참으로 좋았지만, 찬미가의 감동도 그 못잖았죠. 그 때 애창하던 찬미가는 ‘주여 옛날 에녹같이’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 데 없는 자’ ‘예수가 내게 계시니’ ‘주 하나님의 권능을 내 찬송합니다’ 등의 곡이었습니다.

찬미의 감동은 말로 다 표현이 안 됩니다. 제가 좋아하는 찬미는 아이적 왓쯔가 작사한 109장 “주 하나님의 권능을 내 찬송합니다”인데, “나 어디 달려가든지 주님이 계시네”로 끝맺는 이 찬미의 감동은 극치입니다. 내 눈이 어디로 향하든지 내 발이 어디로 달려가든지 그 곳에는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이 계신다는 찬미입니다.

찬미가는 이 같은 감동이 넘치는 주옥같은 가사의 보고(寶庫)입니다. 매일 운전대를 잡으시는 분에게 권하고 싶은 경험입니다. 당시 저는 가사를 큰 글씨로 프린트하여 차창 안쪽의 잘 보이는데 붙여 놓고 찬미를 불렀습니다. 아무런 장애를 받지 않는 차 속에서 목청 돋워 부른 찬미의 감동은 정말 좋았습니다.

찬미가는 우리의 일상에서 사용할 수 있는 아주 좋은 문화 콘텐츠 중 하나입니다. 주부들의 가사노동이나 개인 직장의 일상에서 사용할 수 있는 축복의 자산입니다. 그러나 일상에서의 찬미가 사용은 이처럼 큰 축복이 되지만, 자칫 잘못하면 오용할 위험성이 있습니다. 일례로 교회주최로 관광버스 여행 중에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작은 오락순서를 가질 때가 있는데, 이때 대개 즐겨 부르는 노래를 부르기 마련이죠.

어느 분이 자기 차례에서 “죄송합니다. 저는 아는 노래가 별로 없기 때문에 찬미가를 부르겠습니다”하고 찬미를 부르는 경우를 왕왕 봅니다. 그러나 이런 행위는 금해야 합니다. 찬미는 받으시는 대상이신 하나님이 계십니다. 예배에서의 찬미는 말할 것도 없지만, 일상에서의 찬미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라는 인식을 가져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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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찬미가는 고전음악 감상으로 이끄는 매체가 된다는 것입니다. 찬미가는 너무 친근한 노래이기 때문에 대수롭지 않은 음악으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음악으로서의 찬미가의 예술성은 세상의 어느 음악에 뒤지지 않는 최고의 것입니다. 따라서 일반음악처럼 찬미가도 감상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찬미가는 이중적인 감동을 주고 있죠. 하나는 영적 감동이고 또 하나는 예술 감동입니다. 예술 감동은 고전음악 감동입니다. 찬미가를 통해 형성된 음악 감동 기능은 교회 모든 행사에서 접하는 합창과 독창, 피아노와 오르간을 비롯한 모든 기악연주에서 사용되는 고급한 고전음악 감상으로의 길을 열어 주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교향곡이나 실내악곡을 비롯한 모든 독주나 성악독창 곡들을 감상할 수 있는 수준으로 이끌어 줍니다. 결국 모든 회중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상당 수준의 고전음악 감상능력을 갖게 된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고전음악 대가들의 음악을 쉽게 만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셈이죠.

우리는 일반인들이 일평생 한 번도 누릴 수 없는 예술 감동 속에 살고 있습니다. 헨델의 <메시야>나 하이든의 <천지 창조>와 같은 대곡들을 들을 때에 불편하거나 지루하지 않은 것은 그만큼의 감상능력을 갖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 능력은 소나타나 실내악을 이해하는 데도 많은 도움을 줍니다. 이 같은 찬미가를 통해 얻은 값진 음악 감상 능력을 가정에서 활용했으면 좋겠습니다.

일반인들이 꿈도 꾸지 못하는 고전음악으로의 용이한 접근은 찬미가가 주는 또 하나의 큰 축복이 아닐 수 없지요. 고전음악 감상이 일상화가 되었으면 참으로 좋겠습니다. 고전음악에 대한 화잇 선지자의 경험을 소개합니다.

News_9342_file4_v.png * 1893년 2월, 뉴질랜드 항만에서의 선상 연주회
“약 한 시간가량 안개가 걷히지 않아 햇빛은 차단되고 있었다. 승객들은 초조한 가운데 안개가 걷히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안개 자욱한 선상에서 아름다운 연주가 들려왔다. 잘 선택된 음악으로 연주는 세련되고 부드러웠다. 하선하지 못하고 조바심 중에 있었던 승객들을 즐겁게 해 주었다. 이는 동승하고 있었던 일단의 음악인들의 즉흥 연주였다” <편지 6b, 1893, pp. 2,3.>

스위스의 비어가든에서의 아름다운 관악기 연주회
“그날 밤 있었던 연주회는 참으로 아름다운 음악회였다. 음악회가 끝나면서 길 맞은편 가까운 곳에서는 불꽃놀이도 있었다. 그곳은 아름다운 꽃들과 키 큰 나무와 관목들로 꾸며진 공원이었는데, 드리워진 우아한 나무그림자로 인해 공원은 더욱 아름답게 보였다. 시 소유지인 이 공원에는 100여명이 앉을 수 있는 의자와 타원형의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일몰에 열린 관악연주회는 참으로 아름다웠다” <원고 33, 1886>

* 형용할 수 없이 아름다운 연주
“우리는 형용할 수 없는 음악회를 보고 있었다. 9명으로 구성된 작은 합창단이었는데 그들이 네덜란드인인지 독일인인지 아니면 프랑스인인지 불분명하지만 저들의 합창은 화려했으며 너무나 좋았다. 내 생각에는 이들은 주일학교 교사들인 것 같았다” <편지 8, 1876>

하루가 시작되는 싱그러운 아침, 고전음악이 들리는 거실을 상상합니다. 그것도 잔잔한 실내악이 흐릅니다. 눈을 비비며 거실로 나오는 귀여운 아이의 귀에 처음 들리는 음악이 고전음악이라면 그 아이는 대중가요에 흥미가 없는 어른으로 성장할 것입니다.

음악 감동은 영유아 시절에 형성되기 시작한다는 사실은 상식입니다. 다시 말씀 드리지만 그런 음악환경 속에서 성장한 아이들은 장성한 후에도 대중가요에 빠지지 않습니다. 영 유아나 소녀 소년 시절의 뇌리에 형성된 예술적 감성은 그 아이의 평생에 영향을 미칩니다.

고전음악이 어려운 것은 강한 오락성은 약한 반면, 예술성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찬미가를 통해 이미 고전음악에 입문한 상태죠. 이것은 교회음악과 고전음악이 동질의 음악이기 때문입니다. 고전음악이 끝나는 바로 그 순간에 찬미가로 예배를 시작해도 아무 지장이 없습니다.

이같이 찬미가는 우리 삶의 모든 방면에서 축복이 되는 문화콘텐츠인 것입니다. 이같이 찬미가는 고전음악으로 인도하는 길잡이 역할을 합니다. 복음은 내세의 축복이지만 현세적인 축복이기도 합니다. 저의 말씀을 끝가지 읽어주신 여러분들에게 심심한 감사를 올립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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