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태건의 내러티브 리포트] ‘호남선교 1번지’ 나주교회(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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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이른 시각은 아닐까, 다소 걱정이 앞섰지만 한정된 시간 안에 취재를 마무리하려면 조금은 서둘러야 했다. 잠시 기도하고 하태열 집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종종 인터뷰 자체보다 인터뷰이를 섭외하거나 약속을 잡는 일에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 때가 있다.
다섯 차례 정도 신호가 간 뒤 통화가 연결됐다. 다행히 점심 즈음 시간을 낼 수 있다는 답을 받았다. 나주교회에 관해 이야기를 나눠야 하니 교회에서 만나기로 했다. 박석봉 목사와 함께 셋이서 점심식사를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박 목사는 오전에 목포로 출장을 다녀와야 한다고 했다.
다행히 첫 번째 인터뷰이는 수월하게 섭외했다. 문제는 나주학연구소 김관영 소장이었다. 나주교회가 세운 금명학원과 본량의숙이 소개된 <근대이행기 나주지역 개신교회 지역교육 일고찰> 논문은 전남대학교 호남학연구원이 발행하는 <호남학 제74집>에 수록됐다. 전남대 소재지는 광주광역시다. 따라서 김관영 소장의 주 활동지는 전남대가 위치한 광주광역시일 공산이 크다. 어쩌면 서울로 올라가는 길에 만나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걱정도 모두 그가 인터뷰에 응했을 때의 일이다. 일단은 통화가 연결되기를 바라는 수밖에.
통화연결음이 몇 번이나 울렸을까. “지금은 전화를 받을 수 없어. 음성사서함으로 연결됩니다” 하는 안내멘트가 흘러나왔다. 너무 이른 시각인 걸까. 아니면 낯선 번호로 걸려오는 전화는 받지 않는 걸까. 곧바로 한 번 더 전화할까 싶었지만 시간차를 두기로 했다. 연달아 부재중 전화 기록이 찍혀 있으면 부담스러울 수도 있을 것이다. 대신 문자메시지를 남기기로 했다. 편한 시각에 전화를 주길 바라며.
따뜻한 차를 한 잔 마시고 짐을 챙겨 숙소에서 나왔다. 퇴실시간은 아직 한참 남았지만, 한효선 씨가 운영했던 한약방 터를 확인하고 싶었다. 새로 제과점이 들어섰다는 것을 보면 희미하게 흔적만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직접 보고 싶었다. 찾아가는 길을 취재수첩에서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그 자리에 새로 생겼다는 빵집은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대부분 알법한 유명 프렌차이즈니까.
구도심의 버스터미널 가는 길 사거리이며, 허옥희 집사의 설명과 일치하는 곳이었다. 새로 자리를 잡은 가게는 너무도 번듯한 새 건물이었다. 심지어 전날 기자가 지나온 곳이었다. 역시나 한효선 씨 한약방의 흔적은 조금도 찾을 수 없었다. 어느 정도 예상했지만, 그래도 약간 허탈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만약 나주교회가 새 성전을 세울 당시 구교회를 보존하자는 의견이 없었다면 결국 사라져 후손의 기억 속에만 존재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는 생각이 스치자 아찔한 기분마저 들었다.
사거리 반대편에서 생각을 정리하다 보니 어느새 하태열 집사를 만날 시각이었다. 서둘러 나주교회로 발을 옮겼다. 어느새 친숙해진 교회가 기자를 반기는 듯했다. 아직 시간의 여유가 있어 구교회 정문 옆에 마련된 벤치에 앉아 한숨 돌리고 있으니 하태열 집사의 자동차가 마당으로 들어왔다.
“자그마한 교회에 취재할 것이 뭣이 있어서 이리도 멀리까지 오셨어요?” 운전석 문을 열고 내린 하 집사가 기자와 악수하며 말했다. 교회의 크고 작음보다 그 역사의 깊이가 기자를 여기로 이끌었다고 이야기하며 집사님 어릴 적 교회의 모습은 어땠는지 물었다. 보통의 인터뷰라면 핵심 질문을 하기 전에 친밀감을 쌓는 이야기를 나누기 마련이지만, 하 집사에게는 바로 듣고 싶은 질문을 던졌다. “집사님 어릴 적에 나주교회는 어떤 모습이었습니까?” 하 집사에게서 무엇이든 물어보라는 듯한 분위기를 느낀 까닭이다.
“원래 여기까지가 다 장터였어요. 큰 우시장이 있어서 쇠고기가 엄청나게 유통됐지요. 여기에 왜 곰탕집이 많은지 아시겠지요? 그러니까 옛날에 교회 앞에 하루에도 수천 명이 지나다닌 겁니다. 아버님 말씀에 따르면 여기서 천막을 치고 전도회를 하면 사람들이 어마어마하게 모여들었답니다. 많은 경우 교회에서 나눠주는 밀가루나 옥수수가루를 받으려고 온 것이지만, 그들 중에 누가 어떻게 복음을 받아들이고 회심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죠”
하 집사는 비교적 최근에 보수한 창틀을 가리키며 어릴 적 유두고처럼 여기 창틀에 앉아서 놀고는 했다고 전했다. 잠시 회상에 잠기던 그는 화단에 세워진 ‘나주지역 선교 100주년 기념비’ 앞에 털썩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그러더니 여기 기념비에 적힌 내용은 자신이 아버님께 들었던 내용과 조금 차이가 있다고 설명했다.
기념비에는 “이근억, 김석영 두 전도사가 1914년 5월 이후 호남선을 타고 나주역에 내리면서 처음 복음이 전파되었”다고 기록돼 있지만, 하 집사가 아버지에게 전해 듣기로는 이근억, 김석영 두 전도사는 나주역이 아니라 영산포를 통해 배를 타고 이 지역에 들어왔다는 것이다. 영국의 역사학자인 에드워드 카(Edward Hallett Carr)는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했다. 마찬가지로 역사를 사이에 둔 다양한 시각의 대화는 우리네 역사의 뿌리를 더욱 튼튼하게 만드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점심 즈음에 만나 한참 대화를 나눴으니 시계를 보지 않아도 식사시간이 꽤 지났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하 집사는 “나주에 오셨으니 곰탕 한 그릇 하셔야 하지 않겠어요?”라고 하며 앞장섰다. 넘어지면 코 닿을 곳에 수십 년 전통은 우스운 곰탕집들이 즐비한 곳이 바로 여기 곰탕거리다. 하 집사는 그중에서도 가장 역사가 오래되고(100년이 훌쩍 넘었다) 유명한 집을 지나 인근의 다소 허름한 집으로 기자를 안내했다.
자리에 앉은 하 집사는 곰탕 두 그릇을 주문했다. 누가 봐도 전라도식으로 담근 김치를 그릇에 옮겨 담고는 다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기자가 특별히 나서서 질문한 것은 많지 않았다. 하 집사 스스로가 추억을 끄집어내 들려줬다. 그중에는 기사에 담기 힘든 개인적인 추억도 상당했다. 하지만 나주교회의 옛모습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됐다.
서둘러 다시 일터로 향하는 하 집사의 뒷모습을 보며 나주교회가 참으로 거대한 신앙의 유산을 남겼음을 다시한번 확인했다. 오후에는 관광지도를 따라 나주교회가 코스에 포함된 ‘나주읍성 고샅길’을 한 바퀴 돌아보려 했다.
하지만 어두컴컴하던 하늘에서 금세 빗방울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얼른 인근 카페로 들어가 비를 피했다. 젖어버린 머리를 닦고 있을 때 주머니 속의 스마트폰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통화버튼을 누르자 스피커 너머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녕하세요? 김관영입니다. 문자메시지 보고 연락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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