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분이 하신 일
페이지 정보
본문
새로운 길을 개척할 때는 예기치 못한 장애물을 만나기 마련이다. 『애드벤티스트 월드』가 창간되는 과정도 마찬가지였다. 사업의 발판을 마련하는 과정에 함께했던 전병덕 목사를 박재만 시조사 편집국장이 만나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 편집실
목사님께서는 『애드벤티스트 월드』 창간 당시 때부터 몇 년 전까지 본 잡지의 국제출판국장으로 일하셨는데 본 사업에 한국이 얼마간의 역할을 담당했다고 들었습니다. 어떤 부분을 담당했나요?
다른 연합회들과 마찬가지로 한국연합회 역시 안교 헌금을 포함해 대총회로 보낼 재정들이 있는데 수십 년간 해외로 이체되지 못하고 국내에 묶여 있었습니다. 국내 외환관리법의 규제로 현금을 해외로 보낼 수 없기 때문이지요. 그 액수가 상당했습니다. 헌금은 드린 사람의 의도에 따라 목적이 지정된 대로 써야 한다는 것이 재림교회 헌금 사용의 원칙인데 거기에 어긋나는 상황이 지속된 것입니다. 여러 의구심을 불러올 수도 있는 문제인데 딱히 해결할 도리는 없는 상황이었어요. 그러던 차에 『애드벤티스트 월드』가 논의되었습니다.
그 당시 대총회에서는 세계 교회와 어떻게 소통하였나요?
재림교회에는 대표적인 정기 간행물인 『애드벤티스트 리뷰』가 있지만 주로 미국 내에서만 통용되었습니다. 무료로 전 세계에 보급하는 교단 잡지가 없었지요. 그 무렵 자체적으로 잡지를 발행해 세계에 배포하는 다른 사역 단체들이 있었습니다. 얀 폴슨 당시 대총회장은 세계 교회와 호흡을 같이할 수 있는 재림교회의 대표적인 잡지가 없는 것을 아쉬워했습니다.
그래서 세계적인 잡지를 만들자는 제안이 나왔어요. 세계 교회의 연합을 공고히 하고자 노력하는 가운데 이와 같은 잡지 보급의 필요성이 대두되었지요. 더군다나 재림교회의 28 기본 교리를 일반 교인들이 쉽게 수긍할 수 있도록 돕고 곳곳의 최신 소식을 공유하며 선교를 장려할 수도 있거든요.
『애드벤티스트 월드』 발행으로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는 셈이군요?
맞습니다. 대총회로 송금하지 못하여 한국에 묶여 있는 헌금을 여기에 사용하면 좋겠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그런데 막상 시작하려니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와 같았어요. 그 당시 대총회는 대한민국 굴지의 로펌을 통해서 사업을 추진했는데 한국의 잡지 발행을 관리하는 문화관광부(현 문화체육관광부)로부터 부정적인 답변만 받았거든요. 한국에 기반을 둔 국제적인 잡지를 발행하려면 발행 주체와 필진의 50퍼센트 이상이 한국인이어야 한다는 거예요. 그 당시 이 사업에 관여하는 한국인은 저 하나뿐이었는데 말이지요.
이런 어려움에 봉착한 때가 시기적으로 언제쯤이었나요?
2005년도 초였다고 기억해요. 저는 2년 전에 이미 북아태지회장에서 은퇴한 상태에서 이 일을 돕고 있었지요. 2005년 7월에 개최될 대총회 총회가 얼마 남지 않은 때였어요. 총회 때 『애드벤티스트 월드』 창간호를 분배하기로 내부적으로는 계획까지 다 해 둔 상태였는데 첫걸음도 못 뗐던 것입니다.
사실 저도 곁에서 지켜보았지만 로펌의 일처리 방식이 그다지 탐탁지 못했어요. 돈을 받았으니 알아보기는 했겠지만 적극적인 해결 의지는 없는 듯 보였지요. 그래서 제가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는데 대총회 임원과 윌리엄 존슨에게 “이런 일을 하다 보면 대다수는 잘 모르는 다른 문이 열려 있는 경우가 많다. 내게 한번 맡겨 주면 그 문을 열어 보겠다.”라고 했어요. 그랬더니 다들 “어떻게 하려는 거냐?”라며 놀라서 묻더군요.
목사님의 제안은 무엇이었나요?
“반드시 해내겠다고 장담은 못하지만 노력은 해 보겠다. 정문으로 못 들어가면 후문을 찾아보겠다. 내가 사는 아파트에도 후문이 있는데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을 뿐이지 이것도 정식으로 사용하는 문이다. 그런 문이 있을 것이다.”라고 했지요. 제가 북아태지회장 당시 자금 사용에 애를 먹을 때도 금융감독원의 고위 관리 중 알고 지내는 분에게 “우리에게 애로 사항이 있는데 해결책이 있으면 도와달라. 불법을 가르쳐 달라는 게 아니라 우리가 접근하기 힘든 다른 길을 가르쳐 달라는 것이다.”라고 솔직하게 말해 문제가 해결된 적이 있어요. 우리의 사정을 숨김없이 다 말하면 손해일 것 같지만 진정성이 통하기도 하거든요. 그런 식으로 길을 찾아보겠다고 대총회 사람들에게 말한 것이죠.
그런 다음에 어떻게 하셨나요?
문화관광부의 실무자를 찾아갔어요. 연합회 재단실에 계시는 분이 대학원에서 같이 공부했던 동문 중 아는 분이 문화관광부 감사로 있다고 해서 함께 그분을 찾아갔지요. 우리 사정을 다 터놓고 이야기하면서 도와달라고 부탁했어요. 알고 보니 잡지 인가는 문화관광부가 아니라 지방 도청에서 하는 거였어요. 하지만 도청에 찾아갈 필요가 없었어요. 그분이 사무실에서 전화 한 통화로 연락하니 몰랐던 길이 열리고 이후 신청을 냈더니 등록 허가가 나왔어요. 돈 한 푼 안 들이고 오히려 그분에게 접대까지 받으면서 문제를 해결했지요.
그런 다음 대총회 측에다 “됐다.”라고 연락했더니 믿지를 않더군요. 등록 허가증은 그해 7월 대총회 총회가 개최되고 있을 때 나왔어요. 한국에서 팩스로 받아 번역해서 전달했지요.
그렇게 『애드벤티스트 월드』 발행의 발판이 마련된 것이군요?
비록 7월 대총회 총회 기간에 맞춰 창간호를 발행하지는 못했지만 인가를 받자마자 서둘러 잡지를 발행한 덕분에 9월 호부터 발행을 시작할 수 있었어요. 얀 폴슨, 윌리엄 존슨은 제가 무슨 요술이라도 부려서 ‘『애드벤티스트 월드』 나와라 뚝딱!’ 해서 나온 것처럼 생각하는데 그건 아니에요. 위기를 기회로, 걸림돌을 디딤돌로 바꾸는 데 능수이신 분이 누구인지 우리는 다 잘 알고 있잖아요. 그래요. 모든 건 그분이 하신 거예요.
박재만 Ph.D. 시조사 편집국장이며 『애드벤티스트 월드』 한국 담당 편집인이다.
- 이전글챗GPT와 교육과 동정심
- 다음글달려가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