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의 탈식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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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3세기에 만리장성을 건설한 진(秦) 왕조가 중국을 통일했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진 왕조의 가장 큰 업적은 오늘날 정치학자들이 일컫는 근대 국가 제도를 만들어 낸 것이다. 왕족과 행정부를 분리한 효율적인 관료제로 중국은 수백 년 전까지도 유럽에서는 볼 수 없었던 강력한 국가를 탄생시켰다.
이러한 놀라운 성취에도 불구하고 구약 성경은 그 일을 일체 언급하지 않는다. 구약 성경은 중앙아메리카 마야인들의 건축 지혜와 문명의 발전도 무시한 채 오히려 고대 근동 지역에서 일어난 이스라엘과 몇몇 경쟁자 사이의 권력 이동에 대해 주로 다룬다. 타 문명들에 대한 이런 무감각은 의도적일까? 아니면 포스트모던 경험이 선사하는 세계적 감각이 성경에는 결여되었기 때문일까?
구약 성경의 역사가 인류의 기원으로 시작한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 질문은 더욱 부담스럽다. 인류의 조상인 아담의 창조로 이야기를 시작해 놓고 나서는 아브라함과 그 후손의 대적들 사이의 지역 분쟁에 관한 이야기와 예언이라는 상대적으로 규모가 적은 고대 근동으로 ‘격하’되는 모습이 모순적이지 않은가?
지역에서 세계로
놀랍게도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겪은 특정 지역의 이야기가 이후 세계의 상상력을 사로잡았다. 그와 마찬가지로 여행 경험도 별로 없는 갈릴리 출신 나사렛 예수는 문화적으로 편협한 무리에게 자신이 가르친 내용이 결국 세계 모든 사람에게 전해질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예수를 따르던 시골뜨기들은 세계를 바꾸는 주체가 되었고, 그들이 전한 그리스도의 영감적인 통찰은 세월의 시험을 견뎌 냈다. 구약 성경이 아담과 함께 전 세계적인 영역에서 시작해 아브라함으로 좁아지다가 그리스도교의 전파를 통해 끊임없이 세계적으로 부상하는 일련의 전개 과정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제는 유명해진 이름 없는 사마리아의 여인이 예수님께 말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요 4:20).
사마리아 여인의 발언은 강자와 약자 사이의 끊임없는 긴장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들을 비판하는 포스트모던적 시각을 반영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녀의 조상들이 “이 산”에서 예배하는 것을 승인하셨는데 “유대인들”이 “예배를 드릴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오만하다는 것이다. 그녀의 비난은 유대인들이 고대에 예배를 드리던 그리심산을 비신성화함으로써 사마리아인들의 시간(역사)과 공간에 대한 감각을 빼앗았다는 것이다. 그 대신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이 출입할 수 없었던 예루살렘 성산을 강요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대답은 정치적으로 볼 때 올바른 대답은 아니었다.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22절).
그리스도는 자신을 유대인의 일원으로 포함시킴으로써 특정 지역의 민족, 땅, 시간과 관계를 맺는 하나님의 오랜 경향을 다시 드러내신다. 아브라함의 지역 생활은 임의적이고 특이해 보이지만 그것은 세상의 모든 가족에게 복의 원천이 되었다. 그리고 약 2,000년이 지난 아브라함의 사망 이후에는 베들레헴의 특정한 헛간에서 약속된 세상의 구원자가 태어났다.
거듭거듭 하나님은 작은 것, 특정한 것, 지역적인 것을 찾는다. 그런 다음 자신이 선택한 좁은 플랫폼에서 전 세계적으로 영향력 있는 문화적이고 역사적인 기적을 시작하신다. 그렇기에 구약 성경의 목가적인 히브리 문학이 여전히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세계적 지혜를 능가하는 것이다.
우상 숭배의 한 형태
하나님이 역사의 한계에 진입하신 것은 역사의 한계를 뛰어넘는 것이다. 하나님은 한 아브라함과 연합하심으로써 땅의 모든 족속에게 복을 주신다. 예루살렘과 연합하려는 그분의 목적은 그곳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그분은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고 말씀하셨다.
사마리아의 여인에게 대답하시며 예수님은 또한 말씀하셨다.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요 4:21, 23).
하나님은 예루살렘의 성산이 다른 사람들을 소외시키는 문화적 철옹성이 되기를 원치 않으셨다고 이사야는 말한다(사 56:7). 하나님은 역사를 통해 한 개인에서 많은 개인으로, 지역적인 것에서 세계적인 것으로 움직이신다.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고 구원하고자 하신 까닭에 예루살렘이 특권을 누린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 역사의 울타리 안에서 일하시기에 안타깝게도 인류는 그분의 더 폭넓은 목적보다 그분이 일으키는 기적의 도구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 그리스도 당시의 바리새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들은 유전적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이었지만 그리스도에 대한 그들의 증오심은 아브라함의 믿음에도 그들이 적대적이었을 것임을 드러냈다(요 8:39~40).
아브라함이 자신의 후손들에게 물질적으로 준 것은 불멸의 씨가 아니었다. 구원은 오직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벧전 1:23)에서 이른다.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은 한 사람을 통해 다른 사람에게 도달한다. 아브라함의 신실함은 하나님의 영속적인 말씀 즉 그분의 생각과 감정을 끊김 없이 전달할 수 있는 효과적인(결함이 있기는 하지만) 문화적 매개체를 만들었다. 궁극적으로 이것은 결함 있는 남녀를 통해 기꺼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영감받은 선지자들의 긴 목록에서도 나타난다.
그런데 자비로우신 하나님이 우리의 잘못 엇나간 경험의 잔해 사이를 지나실 때 우리는 그분의 발걸음을 겸손히 따르기보다 그분이 걸어간 망가진 지대를 경배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우상 숭배이다. 이렇게 우리는 하나님을 알기 전보다 더 못난 죄인이 된다.
이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바리새인들과 논쟁을 벌일 때 그들의 왜곡된 인간 논리와 신성한 실재 사이에 존재하는 팽팽한 긴장감을 부각시키셨다(요 8:31~59). 아브라함과의 신체적 관련성을 자랑스러워하는 바리새인들에게 그리스도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요 8:44). 이것은 모든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더 오래 참고 무한히 확장되는 사랑보다 하나님의 지상 도구에 더 큰 경배를 드리는 사람에게 울리는 엄중한 경고의 말씀이다.
결함 있는 일꾼들
신약 성경의 기록이 끝난 이후에도 하나님이 인간사에 개입하시는 방식은 변하지 않았다.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시작해 사마리아에 이른 뒤에 전 세계에 퍼진다는 그리스도의 정확한 예언은 역사가 증명한다. 처음에는 아브라함의 후손인 사도들이 전파했지만 그들이 투옥되어 죽임을 당한 뒤에도 하나님의 말씀은 발이 묶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이 떠오를 수밖에 없다. ‘제자들 이후 복음을 눈에 띄게 전한 문화적 수단은 무엇이었나? 하나님의 말씀을 옮겨 적고 번역하는 동시에 세상의 가장 먼 곳에 그리스도를 전하는 일은 주로 누가 맡았는가?’ 지난 2,000년 동안 아르메니아, 인도, 에티오피아에 끈질긴 기독교적 전통이 존재했다. 그러나 이러한 전통이 그리스도의 예언대로 전 세계를 일깨우는 복음의 발단은 아니었다.
논쟁의 여지 없이 예루살렘 이후에는 유럽이 기독교 활동의 주 무대가 되었다.
종교 개혁이 일어난 뒤 이 현상은 더욱 뚜렷해졌다. 복음은 오순절 이후 그 어느 때보다 세계적으로 전파됐다. 오늘날 수백만이 글을 읽을 수 있는 이유는 무엇보다 그들(혹은 그들의 조상들)이 가장 먼저 성경을 모국어로 읽게 되면서부터다. 이 점에 대해 우리는 틴들, 녹스, 루터 같은 혁명가들에게 감사해야 한다.
유럽과 미국에서 이룩한 개신교의 성과만 언급하면서 그 유감스런 잔혹함을 눈감아서는 안 된다. 식민지의 압제자들이 지닌 편견을 똑같이 지니고 있는 유럽과 미국 출신의 선교사들이 많았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회에 찾아간 전도자들 중에는 복음이 자신에게 맡겨졌다는 억압적 우월감에 물든 이가 많았다.
우리는 기독교 역사의 이면에 담긴 부끄러운 슬픈 후유증을 정직하게 대면해야 하며, 하나님께서 항상 결함 있는 존재를 사용해 인류에게 자신의 선하심을 전하신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또 하나님의 자비는 언제나 우리의 위선적인 야만성보다 훨씬 놀랍고도 아름답다. 구원하시는 그리스도의 권능은 그분의 복음을 잘못 전하는 사람들을 넘어선다. 그분이 세상과 소통하는 데 방해가 되는 인간적 결점(베드로의 결점이든 칼뱅의 결점이든)은 없다. 기독교 유럽 중심주의란 하나님이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 유럽을 도구로 사용하셨다는 왜곡된 현실 해석이다. 그러나 이런 것도 구원받을 사람을 찾으시는 하나님의 계획을 방해하지는 못한다.
인간 도구의 불성실에 대해 논하면서 바울은 이렇게 진술했다. “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어찌하리요 그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그 대신에 “우리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무슨 말하리요”(롬 3:3~5).
유럽 기독교인들이 토착민과 남반구의 저개발국에 저지른 악행을 빌미로 성경의 역사와 예언을 재해석할 필요는 없다. 아프리카에서 기독교의 급속한 성장은 점점 더 세속화되는 서구인들에게 역설적인 증거로 작용하고 있다. 기독교는 이미 죽은 유럽 식민 전략가들이 남긴 상처보다 유색인종에게 더 큰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캄보디아 신자가 재림교회로 개종하면서 자신의 문화적 정체성을 미국 선교사의 서구적 관점에 종속시킬 필요는 없다. 애국심의 발로에서 그리스도를 미국과 동일시하는 것은 인종 차별적 민족주의로 이어지며 하나님의 공의로운 정죄를 받게 될 것이다. 반면에 기독교 역사를 억압적이고 특권적인 국가들로 축소하는 마르크스주의 변증법은 역사에서 신의 공간을 부정하는 저주스러운 무신론적 진공 상태를 조장한다. 하나님은 역사 속으로 들어가 제한된 도구를 사용해 모든 인류를 구원하기로 선택하셨다. 고대에 그분은 예루살렘을 통해 세상에 다가가셨다. 좀 더 가까운 과거에는 유럽과 아메리카를 중심으로 활동하시며 (다시) 세상에 다가가셨다. 이것을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하나님께서 어떤 곳에서 활약하실 때는 온 세상에 복을 주기 위해 그렇게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통해 또 유럽과 아메리카를 통하여 세상에 복 주신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하나님은 자신이 선택한 모든 장소와 시간에서 일하실 수 있음을 여기서 알 수 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기적은 언제나 하나님께 속하지만 그 과정에서 생긴 혼란의 먼지는 우리에게 책임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편파적인 예배의 산을 떠나 신령과 진정으로 아버지께로 돌아가야 한다.
“주여 공의는 주께로 돌아가고 수치는 우리 얼굴로 돌아옴이 오늘과 같아서 유다 사람들과 예루살렘 거민들과 이스라엘이…수치를 당하였사오니”(단 9:7).
“성경에서는 인간을 별로 칭송하지 않는다. 일찍이 세상에 살았던 가장 선한 사람들의 덕목을 자세하게 말해 주는 부분이 거의 없다. 이러한 침묵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다. …사람들이 지닌 장점은 모두 하나님의 선물이며 그들의 선한 행위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진다.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덕이므로 그들의 됨됨이와 성과에 상관없이 그 영광은 오직 하나님께만 속한 것이며 그들은 하나님의 쓰시는 도구에 불과하다. 또 성경의 모든 교훈에서 알 수 있듯이 사람을 칭찬하거나 높이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잘못하면 그로 인해 하나님만 의지하기를 잊어버리고 자신의 힘을 의지하다가 결국 타락하기 때문이다”(부조, 717).
데리바 올라나 에티오피아 전역에 소셜미디어 인쇄물을 전하는 ‘살아 있는 양지피 사역’에 동참하고 있으며 아디아바바바 청소년의 성경 문해력 향상을 위한 학교를 운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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