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살의 율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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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 오죽헌에서
아내의 외가는 강릉에 있다. 그래서 신혼 초에 그리고 아이들이 어렸을 때도 여름 휴가를 강릉에서 자주 보내곤 했다. 강릉을 찾을 때면 신사임당(1504~1551)의 친정집이자 조선의 유학자 겸 관료였던 율곡 이이(1536~1584)의 생가가 있는 오죽헌(烏竹軒)에 자주 들렀다. 율곡 이이는 지금으로부터 약 500년 전, 조선 11대 왕인 중종 31년(1536년)에 태어났다. 평산 신(申)씨 가문에서 태어난 율곡의 어머니 사임당은 남편이자 율곡의 아버지 이원수(李元秀)와의 사이에 이선, 이번, 이이 그리고 이우 이렇게 네 아들을 두었다. 그중 셋째였던 이이(李珥)는 한때 기거했던 경기도 파주 지방에 ‘밤나무(栗)가 무성한 계곡(谷)’이 있는 마을의 이름을 따서 호를 ‘율곡(栗谷)’이라 하였다. 율곡은 외갓집에서 태어나 6살 때 본가인 한성 수진방(지금의 종로구 청진동)으로 이사하기까지 강릉 오죽헌에서 살았다.
16 – 어머니의 죽음
율곡이 16살 되던 해 여름, 그는 가장 사랑하던 어머니 사임당과 사별하는 슬픔을 겪었다. 어머니 사임당은 율곡이 세상에 대한 견문도 넓힐 겸 해서 관료였던 아버지를 따라 지방에 머물러 있는 사이에 운명하였다. 율곡은 경기도 파주 선산에 어머니를 안장한 후 인생의 허무함을 통탄하며 눈물로 3년 동안의 *시묘(侍墓)를 마쳤다. 아무리 생각해도 뜬구름 같은 삶의 의미를 찾을 길이 없었던 율곡은 어느 날 봉은사에서 불교 서적을 읽게 되었다. 그는 불교에서의 가르침이 자신이 그토록 고민해 온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가져다줄 것이라 믿었다.
19 – 금강산 산사에서
19살이 되던 해 봄, 율곡은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에서 진리를 찾기로 작정했다. 당시 조선은 억불 정책 때문에 선비라 해도 한번 불교에 귀의하면 관직으로 나갈 수 있는 길이 영영 막혀 버리던 사회였다. 그래서 웬만한 결단이 아니고서는 엄두도 내지 못할 행동이었던 셈이다. 주위의 놀라움과 만류는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세상의 명예와 이익에는 이미 관심이 없던 율곡은 오로지 참된 진리를 찾아서 끝내 금강산으로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율곡은 금강산에 있는 한 산사에 머물며 일체의 세속적인 관심을 끊고 진리 탐구에만 정진하였다. 그러다 율곡은 불교에서 가르치는 방법으로는 도무지 진리를 깨우칠 수 없겠다는 판단을 내렸고, 결국 1년 만에 모든 것을 정리하고 하산하였다. 인생의 무상함과 삶의 회의에 관한 문제를 풀고자 했으나 이를 해결하지 못하고 20살이 되어 다시 강릉 죽헌리 외가로 돌아왔다.
20 – 율곡의 자경문(自警文)
스무 살의 율곡은 강릉에 있는 오죽헌으로 돌아와 지난날 자신의 잘못을 돌아보고 스스로를 경계하며 자신을 성찰하기 위해 11가지의 좌우명을 기록하였다. 그것이 바로 율곡의 자경문(自警文)이다. 겨우 스무 살 남짓한 젊은 청년 율곡의 다짐이 실린 자경문은 2025년 새해를 맞는 우리에게도 커다란 울림을 준다.
입지(立志) 뜻을 크게 갖자!
과언(寡言) 말을 적게 하자!
정신(定心) 마음을 안정되게 하자!
근독(謹獨) 홀로 있어도 몸가짐을 조심하자!
독서(讀書) 옳고 그름을 분간하기 위해 책을 읽자!
금욕(禁欲) 재물과 명예에 관한 욕심을 경계하자!
진성(盡誠) 해야 할 일이라면 정성을 다하자!
정의(正義) 정의로운 마음을 갖자!
감화(感化) 아무리 포악한 사람이라도 감화시키자!
수면(睡眠) 때가 아닌 잠을 자는 것을 경계하자!
용공(用功) 공부에 힘쓰자!
21 –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자경문을 써 마음을 다잡은 율곡은 1년 동안 열심히 학문에 정진해 이듬해인 21살의 나이에 과거에 응시했고 <장원급제>하였다. <표준국어대사전>에 ‘삼가’라는 단어를 검색해 보면 “겸손하고 조심하는 마음”이라 정의하였다. ‘말과 행동에 있어서 스스로 조심하는 것’을 ‘삼간다’라 하는데 우리 삶에서 ‘스스로를 경계하고 삼가는 행동’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와 유사한 한자어 표현이 셀 수 없이 많다. 가령 각건(恪虔)하다는 ‘삼가고 조심하다’이며, 각근(恪謹)하다(마음가짐과 몸가짐을 조심하다), 각숙(恪肅)하다(삼가고 조심하다), 각신(恪愼)하다(조심하고 삼가다), 겸근(謙謹)하다(겸손하게 행동하고 삼가다), 겸신(謙愼)하다(겸손하게 행동하고 삼가다), 경근(敬謹)하다(공경하고 삼가다), 경신(敬愼)하다(공경하고 삼가다), 공건(恭虔)하다(공손하고 삼가다), 공신(恭愼)하다(공손히 하고 삼가다), 공신(恐愼)하다(두려워하며 삼가다), 근숙(謹肅)하다(삼가 조심하다), 근신(謹愼)하다(몸가짐이나 행동을 삼가다), 속수(束修)하다(마음을 닦고 몸을 단속하여 행실을 삼가다), 숙지(肅志)하다(뜻을 삼가다), 신구(愼口)하다(말을 함부로 하지 아니하고 삼가다), 신근(愼謹)하다(말이나 행동을 삼가다), 신독(愼獨)하다(홀로 있을 때도 언행을 삼가다), 신사(愼辭)하다(말을 조심하고 삼가다), 신언(愼言)하다(말을 함부로 하지 아니하고 삼가다), 심신(審愼)하다(말이나 행동 따위를 조심하고 삼가다), 엄각(儼恪)하다(공경하고 삼가다), 자검(自檢)하다(스스로 절제하고 삼가다), 자인(自引)하다(스스로 삼가다), 주의(注意)하다(마음에 새겨 두고 조심하다), 지중(持重)하다(몸가짐을 점잖고 무게 있게 하며 삼가다) 등 ‘삼가다’의 뜻을 지닌 한자(漢字)가 謹(삼갈 근) 외에도 무려 180여 개에 이른다. 이걸 보면 옛 성현들이 스스로 조심하고 경계하며 삼가는 말과 행동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겨 왔는지 알 수 있다. 이제 2025년 새해를 맞았으니 다가오는 한 해, 스스로에게 어떤 약속과 다짐을 하며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자신만의 자경문>을 써 보면 어떨까? 물론 구체적으로 이루고 싶은 목표를 정하는 것도 좋지만 평생 동안 마음에 담고 살아갈 만한 가치가 있는 다짐을 써 보자. 남을 속이지 않고 정직하게 살 뿐 아니라 나아가 자기 자신을 속이지 않고 정의롭고 당당한 삶, 정직한 삶을 추구해 보자. 생각을 삼가고, 말을 삼가며, 우리의 행동을 근신하며 삼가는 삶을 살자. 같은 맥락에서 일찍이 예수께서도 그의 제자들에게 이렇게 교훈하신 바 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누가복음 17장 3절)
- 박재만 시조사 편집국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