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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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사미디어
등록일 2025.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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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970년 2월 대구교육대학을 졸업하고 그해 3월 1일 자로 경북 영덕군에 소재한 낙평초등학교에 발령을 받았다. 설렘과 기대감 그리고 약간의 두려움을 안고 학교에 부임했다. 낙평초등학교는 전형적인 농촌 6학급 300여 명의 소규모 학교였으며 나는 4학년 50여 명을 담임하게 되었다. 교사로서의 역할과 선교적 사명을 잘 감당하리라는 결심으로 임했다.
학교에 출근하면 우선 교무실에 가서 날인을 하고 교실로 들어갔다. 그런데 토요일에는 종교적 양심상 스스로 날인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날인을 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그래서 함께 부임한 여선생님께 부탁해 토요일마다 대신 날인해 주도록 했다. 하루는 그 여선생님이 “선생님, 왜 토요일만 되면 나보고 날인하라고 하느냐?”라며 웃었다. 내가 그 이유를 설명했더니 “아이고, 선생님! 선생님이 날인하나 내가 날인하나 그게 그거 아니에요?” 하며 깔깔 웃었다. 그러나 그가 내 마음을 어찌 알겠는가!
다음으로 토요일 수업 문제가 있었다. 나는 지혜롭게 시간표를 국어(1), 미술(2), 특별 활동(1) 등으로 교육과정에 위배되지 않도록 짰다. 국어 시간에는 문학 영역의 위인전 이야기로 아브라함, 요셉, 다니엘, 다윗, 솔로몬 등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는데 아이들의 반응이 참 좋았다. 미술 시간에는 화판과 화선지를 들고 나가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이야기를 들려주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나무, 새, 꽃 등을 그려 보게 했다. 그리고 감상도 하게 하며 아름다운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갖도록 하였다.
“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라”(사 40:26).
특별 활동 시간에는 응급 처치법, 끈 매는 법, 별자리 찾는 법 등을 가르쳤는데 아이들이 이 시간을 무척 좋아했다. 퇴근 후 오후에는 마을 앞으로 흐르는 ‘오천 시냇가’ 옆에 내가 마련한 숲속 작은 공간에서 정식으로 예배를 드렸다. 이곳은 나와 하나님이 만나는 장소였다. 안교 시간에는 서기 보고와 사업 장려를 읽고 교과 공부를 했다. 설교 시간에는 헌금, 찬양을 드린 후 성경책과 『시조』, 『교회지남』 등을 읽었다. 내가 하나님을 부르면 하나님께서 응답하시고, 하나님이 나를 부르시면 내가 대답하고, 내가 눈물을 흘리면 하나님께서 그 눈물을 닦아 주심을 체험하였다. 주님과 함께하는 그 시간은 참으로 행복한 시간이었다.
나는 하나님께 지금도 행복하지만 성도들과 함께 교회에서 예배드리고 싶다고 간절히 기도했다. 그런데 이 기도가 응답되었다. 정말 기적 같은 일이었다. 1972년 10월 1일 자로 영덕군에서 유일하게 재림교회가 있는 강구초등학교로 발령이 난 것이다. 10월에 발령이 나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영덕군 교육청이 경북 교육청으로부터 강구초등학교를 연구 학교로 지정받아 인사 재정비 차원에서 인사를 단행하였던 것이다. 이는 분명히 하나님께서 내 기도에 응답하신 하나님의 섭리임을 믿는다.
발령을 받고 나는 강구교회 사택에 살 수 있는 특혜까지 누리게 되었다. 저녁 예배에만 참여해도 얼마나 큰 은혜인지! 그러나 교회 사택에 살면서 아내는 토요일에 교회에 나가고 나는 학교에 가야 했기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내 마음을 아시고 또 길을 열어 주셨다. 당시 교육대학은 정부 방침에 따라 학생들에게 수업료 면제, 병역 면제 등 여러 특혜를 제공했지만 졸업 후 공립학교에서 5년간 의무 복무를 해야 했다. 이를 지키지 않으면 교사 자격증 박탈과 군 입대 등의 불이익을 받았다. 5년은 참으로 길게 느껴졌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 주셨다. 1974년 4월, 영남합회에서 대구삼육초등학교에 결혼으로 인해 교사가 공석이 되었으니 올 마음이 없느냐는 제안을 하였다. 당시 나는 아직 1년이 남아 어렵다고 했다. 그런데 합회 교육부에서 이 문제를 경북 교육청과 협의해 잘 해결해 주어서 사표를 내고 대구삼육초등학교로 가게 되었다. 당시 대구삼육초등학교는 교육 환경이 매우 열악했지만 나는 오직 믿음으로 부임하였다.
학생 수 2,000여 명의 영덕에서 모두가 가고 싶어 하는 강구초등학교를 떠나는 것을 ‘이해가 안 된다’고 걱정하며 한마디씩 했지만 그들이 내 마음을 어찌 알겠는가! 하나님께서 내 길을 인도해 주심에 감사할 따름이다.
1974년 4월 26일 아침, 드디어 대구삼육초등학교에 부임하여 전교생과 함께 아침 조회 예배를 드렸다. 마침 학교에 있는 버드나무에서 참새들이 유난히 짹짹거리며 나를 환영하듯 노래했다. “이른 아침 참새 노래합니다. 새날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이른 아침 아이 화답합니다. 예수 보호하심 감사합니다.” 어릴 적 성경학교 때 자주 부르던 노래였다. 얼마 만에 불러 보는 노래인가! 참으로 감격적인 순간이었다. 갑자기 울음이 북받쳐 오르는데 주체할 수가 없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진리의 교회에서 자유롭게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된 것이 얼마나 감사하고 기쁜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2). 그날부터 시작하여 나는 42년간 삼육초등학교에서 봉사하게 되었다. 여호와께서 굽이굽이 선하신 길로 인도하심을 경험하며 감사와 찬송 그리고 영광을 올려 드린다.
특별히 감사한 또 하나의 기억은 1970년 3월 17일 첫 월급을 받았을 때다. 참으로 감사하고 신기했다.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먼저 십일조와 각종 헌금을 따로 떼어 드렸다. 매달 월급날이 기다려질 정도로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리는 것이 너무나 기쁘고 감사했다.
그해 겨울방학, 고향에 내려가 아버지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어느 날 저녁 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올해는 사과농사와 밭농사가 잘되어 과수원 땅 1,000여 평을 매입할 수 있었다고 하셨다. 그해는 가뭄이 심하고 병충해도 많아서 다른 집들은 농사가 잘 안 되었는데 우리 집 농사만 유독 잘된 덕분이었다고 했다. 동네 사람들이 아버지를 찾아와 특별한 농사 기술이 있느냐고 물었다는데 아버지는 “전과 똑같이 했을 뿐인데 농사가 잘됐다.”고 대답하셨단다.
아버지의 말씀을 들으며 말라기 3장 11절의 약속이 떠올랐다. “내가 메뚜기를 금하여 너희 토지 소산을 먹어 없애지 못하게 하며, 밭의 포도 나무 열매가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 그래서 나는 말했다.
“아버지, 올해 농사가 잘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집을 축복하셨기 때문이에요.”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으셨다.
어릴 적 아버지는 마을에 있는 교회의 여름 성경학교에 참석하는 것을 반대하지 않으셨지만 내가 성인이 되어 교회에 나가는 것은 많이 반대하셨다. 유교 문화에 익숙했던 아버지는 “내가 죽어도 밥 한 그릇 안 떠 놓을 녀석, 내가 죽어 어떻게 조상님의 얼굴을 뵙겠느냐!”며 때로는 꾸짖기도 하셨다. 그러나 이 일 이후 아버지는 더는 그런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그 후 아내와 함께 적극적으로 전도하여 아버지와 어머니가 교회에 나오시고 결국 침례까지 받으셨다. 안동 김씨 가문의 완고했던 아버지가 교인이 된 것은 기적이요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였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 몇 년 전에 유언처럼 말씀하셨다. “이제는 내가 죽어도 제사를 지내지 말고 교회 법에 따르라.” 아버지와 어머니는 교회에 열심히 출석하시다가 주 안에서 평안히 잠드셨다. 나는 여호와의 선하신 인도하심에 감사와 찬송을 드린다. 영광스러운 재림의 날에 부모님을 다시 만날 것을 소망하며 오늘도 주님과 동행하며 하늘 길을 즐겁게 걸어간다.
- 김영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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