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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소, 재림 전 심판, 예언의 신에 관한 질문과 답변

15. 엘렌 화잇이 전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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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렌 화잇은 다방면에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관한 글과 설교를 남겼다. 그녀에게 이 주제는 구원의 계획과 관련된 기타 모든 국면을 포괄하는 것이 되었다. 이 주제에 대한 그녀의 이해가 은혜, 믿음, 칭의, 성화 같은 핵심적인 개념들에 대한 그녀의 정의(定義)를 결정지었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대한 그녀의 신학적인 이해는 존 웨슬리의 이해에 매우 가깝다. 두 사람 모두 신약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용서와 능력(신학적으로 표현하여 칭의와 성화)이라는 하나님의 이중적 선물로 강조한다는 것을 인정하였다. 또한 이들은 다음과 같은 진리를 역설했다. “우리를 칭의하는 의는 입혀지고 우리를 성화시키는 의는 나눠진다. 앞의 의는 하늘에 들어갈 수 있는 우리의 자격이고, 뒤의 의는 하늘을 위한 우리의 적합성이다.”(RH, June 4, 1895; John Wesley, “Sermon on the Wedding Garment,” Wesley's Sermon, vol. 2, CXXIV, 457, 458).

엘렌 화잇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와 믿음으로 말미암는 성화를 분명하게 구분했지만, 칭의와 성화의 근원이 다르다거나 이 두 국면의 믿음이 다른 종류의 믿음을 나타낸다는 식으로 이 둘을 따로 분리하지는 않았다. 이 둘 사이의 불가분적인 통일성을 말하는 가장 분명한 진술은 <정로의 계단>에 나오는 그녀의 전형적인 진술일 것이다. “우리의 희망의 근거는 오직 우리에게 입혀 주신 그리스도의 의[칭의]와 우리 속에서 우리를 통하여 역사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의[성화]에 있다.”(정로의 계단, 63).

그러나 “우리에게 입혀 주시고”, “우리 속에서 우리를 통하여…성령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의”를 받으려면 믿음이 필요하다. 믿음은 수동적인 경험이 아니라, “우리의 지성을 하나님께 바치고 마음과 뜻을 하나님께 굴복하며, 그리스도를 하늘로 들어가는 유일한 문으로 여기는 것이다.”(FW 25). 따라서 믿음은 은혜에 대한 반응일 뿐이지, 믿음 자체가 우리가 용서받도록 해 주는 인간의 공로는 될 수 없다(위의 책, 23-25). 덧붙여 다음의 진술을 보라.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부주의한 신앙이나 단순한 지적 동의가 아니다. 믿음이란 마음에 깊이 뿌리가 박혀서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끌어 안는 것이다. …이런 믿음은 그 믿음을 가진 자로 영혼의 모든 애정을 그리스도에게 두게 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그의 지식은 성령의 지배 아래 있고 그의 품성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꼴 지어진다. 그의 믿음은 죽은 믿음이 아니라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아름다우심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품성과 동화되게 한다.”(가려 뽑은 기별 제1권, 391, 392).

엘렌 화잇은 구원의 계획에 있어서 하나님과 사람이 협력하는 역학적 관계를 강조하였다. 이것은 “모든 능력이 하나님께로부터 오고 모든 영광이 하나님께 속해 있음을 보여 주는 협동체를 이룬다. 책임은 우리에게 있다. …하나님의 능력과 인간이 연합하면 완전한 승리를 얻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의가 모든 것을 이루기 때문이다.”(FW 26, 27).

이런 놀라운 협력을 통해서 칭의와 성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고 통회하는 죄인 자신을 위한 그리스도의 속죄를 깨닫고 그 속죄만이 이생과 내세에서 자신의 유일한 소망임을 받아들일 때 그의 죄들은 사함을 받는다. 이것이 바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이다. …용서와 칭의는 같은 것이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신자는 반역자 곧 죄와 사탄의 자식이라는 지위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충성스러운 백성이라는 신분으로 옮겨지는데, 타고난 선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그를 양자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칭의는 정죄의 반대편이다.”(위의 책, 103, 104). 통회하는 죄인은 하나님께 충성하기로 선택했기 때문에 더 이상 반역자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선택, 곧 신뢰하고 기꺼이 하나님의 순종하는 자녀가 되기로 한 결심을 포함하는 그 믿음을 존귀하게 여기신다.

그리스도교회는 칭의를 경험하기 위해, 다시 말해서 칭의를 받기 전에 혹은 칭의된 상태를 유지시키는 데 어떤 조건이 있는지에 관하여 오랫동안 의견이 분분하였다(참조 위의 책, 111-113). 이에 대하여 엘렌 화잇은 분명하게 말했다. “그리스도께서는 통회하는 자만을 용서하시지만, 그분께서 용서하시는 자를 먼저 통회하도록 이끄신다. 준비하신 섭리는 완전하며 모든 믿는 영혼들을 위하여 그리스도의 영원한 의를 입혀 주신다.”(가려 뽑은 기별 1권, 393, 394). 통회하는 자의 삶에 변화가 일어나면서, 그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깨닫는다. “그리스도의 의를 얻기 위해서는 마음과 정신과 행동의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회개가 무엇임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틀림없이 변화의 역사는 마음에서부터 시작되며, 인간의 모든 기능을 통하여 그 변화의 능력이 나타나야 한다. 그러나 인간은 이와 같은 회개를 자발적으로 할 능력이 없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려는 자는 그리스도의 대속을 통하지 않고는 회개와 용서를 얻을 수 없다는 진리를 받아들여야 한다. 이런 확증을 가지고 죄인은 자신을 위하여 이뤄진 사업과 조화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하며, 하나님의 새롭게 하시는 능력이 자신의 영혼에 임할 수 있도록 끈질긴 탄원으로 은혜의 보좌를 붙들어야 한다.”(위의 책, 393).

하나님의 용서 및 그리스도의 속죄로 말미암는 칭의의 새로운 경험을 받아들이는 믿음은 그 칭의의 경험을 계속 유지시키는 믿음[성화]과 동일한 믿음이다. 칭의는 “한번 구원받으면 영원히 구원받는다.”라는 오류로 이끌 수 있는 평생 한 번만 있는 경험이 아니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의 경험은 “사법적인 허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칭의를 통한 화평을 주고자 열망하신다(롬 5:1). 그러나 엘렌 화잇은 덧붙여 다음과 같은 사실을 강조했다. “어떤 인간이든지 자신이 알고 있는 죄를 여전히 행하고 알고 있는 의무들을 등한시하면서 그리스도의 의의 두루마기로 자신의 영혼을 가릴 수는 없다. 칭의를 얻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심령의 완전한 굴복을 요구하신다. 칭의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사랑으로 역사하고 영혼을 순결하게 하는 활동적이며 살아 있는 믿음을 통하여 계속적인 순종이 있어야 한다.”(가려 뽑은 기별 제1권, 366).
그리스도인이 “거룩한 삶에 있어서 매일 전진하고” “매일 하나님을 향한 회심을 경험할 때” 칭의의 경험은 보증의 기초를 이룬다(교회증언 2권, 505). 그리스도인이 계속 예수님과 동행하면서 누리는 이런 매일의 경험은 성숙한 신자가 끊임없이 용서하시는 주님의 자비에 감사드리도록 지켜줄 것인데, 이것이 바로 믿음으로 말미암는 성화, 곧 “우리 안에서, 우리를 통하여” 일어나는 성령의 역사를 말한다(정로의 계단, 63).

여러 경우에 엘렌 화잇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이중적 측면(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와 믿음으로 말미암는 성화)을 구분하여 말했다. 칭의의 경험에 대하여 그녀는 <정로의 계단>에서 이렇게 적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킬 만한 자신의 의가 전혀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피할 길을 열어 주셨다. …그대가 자신을 그분께 바치고 그분을 그대의 구주로 받아들이면 그대의 생애가 아무리 악했을지라도 그의 공로로 인하여 그대는 의롭다 여기심을 얻는다. 그리스도의 품성이 그대의 품성을 대신하고, 그대는 죄를 전혀 범하지 않은 것처럼 하나님의 앞에 가납된다.”(정로의 계단, 62).

그런 다음 계속하여 그녀는 매일의 칭의 경험으로 뒷받침된 성화의 경험을 묘사한다. “이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는 마음을 변화시키신다. 그분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대의 마음 가운데 거하신다. 그대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대의 뜻을 그분께 계속 굴복시킴으로써 그리스도와의 이 연합을 유지해야 한다. 그대가 이렇게 하는 동안 그분께서 그대 안에서 역사하여 당신의 기쁘신 뜻에 따라 행할 것이다. 그리하여 그대는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고 말할 것이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그대의 마음 가운데 역사하실 때 그대는 [그리스도와] 같은 정신을 나타내고, 또한 [그분과] 같은 행실, 곧 의와 순종의 행실을 행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우리는 자신을 높일 까닭이 없다. 우리의 희망의 근거는 오직 우리에게 입혀 주신 그리스도의 의[칭의]와 우리 속에서 우리를 통하여 역사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의[성화]에 있다.”(위의 책, 62, 63).

불행히도 많은 이들은 그리스도께서 자신들을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을 단순히 “믿는 것”에 자신들의 책임이 달려있다고 생각하면서, 칭의의 경험 곧 하나님의 역할에만 자신들의 미래를 맡긴다. 이런 사람들은 칭의의 믿음과 성화의 믿음의 불가분적인 통일성을 보지 못한다. “이러한 사람들은 다 그리스도의 자기희생적 생애를 살기를 거절하면서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통하여 구원받기를 바라고 있다. 그들은 값없이 주시는 은혜의 풍성함은 찬양하지만, 저희의 품성의 결점을 가리고자 의의 모양으로만 자신들을 덮으려고 한다. 그러나 이 같은 그들의 노력이 심판의 날에는 아무런 소용도 없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의의 선물을 거절하는 자들은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나타내는 품성의 특성들을 거절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혼인 잔치에 참석할 수 있는 적합성[성화]을 줄 유일한 특성을 거절하고 있다.”(실물교훈, 316, 317).
칭의와 성화(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이중적 선물)는 다 같이 신실한 믿음을 통해서만 가능하며, 다 같이 동일한 목표에 기여한다는 점에서 다음과 같은 엘렌 화잇의 진술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칭의와 성화의 세세한 차이점을 엄밀하게 구분해 보려는 잘못을 범하는 사람이 많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이 두 용어의 정의에다 자신들의 사상과 추론을 주입하곤 한다. 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라는 중대한 질문에 관하여 영감의 말씀보다 더 세세하게 정의하려 하는가? 마치 영혼의 구원이 이 문제에 대한 그대의 이해 여부에 좌우되기라도 하는 것처럼 무엇 때문에 모든 세부 사항을 다 풀어내려 하는가? 모든 사람이 다 같은 시각으로 볼 수는 없는 법이다."(MS 21, 1891).

엘렌 화잇은 시종일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칭의와 성화)의 목표를, 마태복음 22:1-14의 비유와 요한계시록 19:8에 묘사된 “혼인 예복”으로 제시한다. “이 비유에서 예복은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들이 갖추어야 할 순결하고 흠이 없는 품성을 표상한다. …성경은 이 세마포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라고 말한다. 이 세마포는 그리스도의 의, 곧 믿음으로 예수를 개인의 구주로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들에게 나눠주시는 그분의 흠 없는 품성을 표상한다.”(실물교훈, 310).

요약하면, 엘렌 화잇에게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이루신 일과 올바른 관계에 들어가[칭의], 예수께서 우리 안에서, 우리를 통하여 행하시는 것과 올바른 관계를 계속 유지하는[성화] 사람에게 일어나는 일을 가리킨다(정로의 계단, 63). 그것은 회심과 통회함으로 시작하여, 은혜 안에서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의 성숙이 계속하여 자라나기를 열망하면서 하나님과 조화를 이루는 사람을 묘사한다. 어떻게 하나님께서 믿음을 통하여 의를 주실 때 어떻게 죄인이 구속함을 받는지를 분명하게 밝혀 주는 것이 예수께서 인간이 되신 주요 이유 가운데 하나이다.

다음과 같은 엘렌 화잇의 진술들은 이런 개념들을 포괄한다.
“하늘 베틀로 짠 이 두루마기에는 사람이 만든 실은 한 올도 섞이지 않았다. 인성으로 나타나신 그리스도께서는 완전한 품성을 나타내셨고 이 품성을 우리에게 나눠 주신다.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사 64:6)과 같다. 우리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다 죄로 더럽혀졌다. …우리가 자신을 그리스도께 바칠 때 우리의 마음은 그리스도의 마음과 연합되고 우리의 뜻은 그분의 뜻에 합병되고, 우리의 정신은 그분의 정신과 하나가 되고, 우리 생각은 그분에게 사로잡히게 되어 마침내 우리는 그분의 생애를 살게 된다. 이것이 바로 그분의 의의 옷을 입는다는 의미이다. 그렇게 되면 주께서 우리를 보실 때에…여호와의 율법을 온전히 순종하심으로써 이루신 당신 자신의 의의 두루마기를 [우리 안에서] 보게 된다.”(실물교훈, 311).
“그리스도교-이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것은 외부에 걸치는 어떤 것이 아니다. 이것은 예수의 생명으로 수놓은 생애이다. 이것은 곧 우리가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고 있음을 의미한다.”(목사와 복음교역자에게 보내는 증언, 131).




-Herbert E. Dougla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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